풍경에 반하고 이야기에 취하는 일본 아키타에서 도야마까지 이어지는 아름다운 기찻길.
서둘러 호텔을 빠져나왔다. 아키타 쌀로 지은 밥도 주고 가격도 저렴한 탓에 선급히 예약했다 결국 3평 남짓한 조금만 방에서 밤새 투덜거리며 유쾌하지 않은 하루를 보냈다. 근처에 그 흔한 편의점도 하나 없다니….
어찌 되었던 호텔을 빠져나와 버스를 타고 아키타 역으로 향했다. 오늘부터 시작되는 바닷길 여행. 아키타부터 도야마까지 이어지는 바닷가 옆 철도 길을 달리는 일본 JR 중 가장 느린 노선을 이용해 바닷길을 달린다. 오늘은 아키타에서 니가타까지. 이동 시간은 5시간 30분 정도지만 중간 환승 대기시간이 약 1시간이라 총 6시간 30분이 걸리는 여정이다.
가장 느린 열차로 아키타를 떠나다.
니가타까지 가는 기차표를 구매하고 출발 시각을 기다리며 돌이켜 본 아키타. 이곳에서 머문 시간은 단 하루뿐이지만 오랜 시간 이곳에 있었듯 떠나기가 아쉽다.
물론 이번 여행 일정 중 가장 최악이었던 아키타 외곽 비즈니스호텔이 걸리긴 하지만 사랑하는 가족과 꼭 다시 오고 싶을 정도로 고요하고 아름다운 도시였다. 시간적 여유만 더 있었으면…. 더 더 머물지 못한 아쉬움도 있지만, 그 아쉬움이 다시 나를 이곳으로 보내줄 것임을 알기에 가벼운 마음으로 아키타를 떠난다.
밤새 눈이 내렸는지 오늘도 연착 소식을 전하는 방송이 한창이다. 눈이 많이 내리는 삿포로와 아키타에 오기 전까지는 일본 JR은 출도착 시간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지키는 열차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북해도는 물론 아키타까지 5분 이상 연착은 기본이었다.
그래. 조금 늦게 출발하면 어때. 나는 여행 중인걸. 연착 소식에 답답해하면 짜증을 내는 일본인도 있었지만, 여행자에게는 지금 순간도 여행이기에 기차 플랫폼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시간을 보냈다.
여행길에서 만난 어르신 아니 여행자.
드디어 기차가 도착했다. 서둘러 남들보다 빨리 기차에 올라 오른쪽에 자리를 잡았다. 이유는 간단하다. 동쪽에서 서쪽으로 기차가 달리는데 바닷길 바로 옆을 달리는 열차인 만큼 겨울 바다를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서 보기 위함이다. 아키타를 출발해 첫 환승역까지 열차는 우리나라 지하철과 같은 나란히 앉는 기차였고 다행히 오른쪽 가장 끝까지를 차지한 나는 입고 있었던 잠바까지 벗고 겨울 바다를 맞이할 준비를 마쳤다.
기차 내부는 영화 필름이 잘못되어 하얀 화면만 나오고 있는 영화관 같았다. 길게 늘어선 좌석 뒤로 제법 큰 창문이 있었는데 열차 칸 내부의 모든 창문 밖으로 보이는 풍경이 모두 하얀 눈으로 덮여 있었기 때문이다. 눈이 부실 정도로.
도시를 빠져 시 외곽으로 달린 열차 한쪽으로 기다리고 기다렸던 바다가 모습을 드러냈다. 끝이 보이지 않는 고요한 바다. 덜컹 덜컹거리는 기차 소리가 신경 쓰일 정도로 소리가 컸지만 힘차게 육지로 치고 올라오는 파도를 보고 있으니 나의 귓가엔 녀석의 소리가 들려왔다.
도시와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빈 좌석은 늘어났다. 아키타 역에서 출발한 지 약 1시간이 되었을 때 나를 포함한 총 세 명의 여행자밖에 남아 있지 않았고, 우리는 약속이나 한 듯 침묵을 유지하며 창 밖의 풍경을 감상했다.
어디까지 가? 아. 니가타까지 가요. 세 사람 모두 알 수 있었다. 모두가 같은 여행을 하고 있다는 것을. 한참을 침묵을 지키던 아저씨가 나에게 말을 건넸고, 난 웃으며 간단한 내 소개와 여행 일정을 이야기했다.
꼭 해보고 싶은 여행이었는데…. 이제서야 하게 되었어. 아오모리에 산다고 자신을 소개한 모자 속으로 흰머리를 감춘 아저씨는 자신의 지난 시간을 이야기했다. 20대부터 계획한 여행이었지만 직장 생활과 가장으로 인제야 이 여행을 하게 되었다며 지난 시간을 회상했다. 바쁘게 살아온 지난 삶을 되돌아보는 아저씨의 표정에서는 진지함과 아쉬움이 묻어났다. 그리곤 나에게 언제든 여행을 떠날 수 있는 사람으로 살라며 조언했다.
한쪽에서 조심스럽게 우리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아저씨가 공감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이야기했다. 눈으로는 연신 뚫어져라 JR 시간표만 보고 있었지만, 귀로는 우리의 이야기를 듣곤 꼭 기억해야 하는 조언이라며 당부를 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30년 동안 회사만 다녔어. 50살이 된 지금 나를 돌아보니 남은 건 언제가 될지 모르는 마지막 순간뿐이더군. 왜 몰랐을까? 가족도 친구도 내 시간도 회사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어느새 우리 셋은 오랜 친구처럼 농담도 주고받으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쉽게도 내 일어 실력이 뛰어나지 않아 대부분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 대부분이었지만 마치 오랜만에 옛 친구를 만나 기쁜 듯 연신 큰 소리로 웃는 두 아저씨의 표정과 행동에 나 역시 타이밍을 맞춰 기차 내부가 울릴 정도로 함께 웃었다.
그림 같은 풍경에 넔을 잃다.
어느새 첫 환승역에 도착했다. 다음 기차에서도 함께 이야기 나누고 싶었지만 나를 제외한 두 아저씨는 환승역에서 내려 1박을 하고 다음날 니가타행 기차에 오른다며 작별을 고했다. 아쉽기도 하지만 그들과 함께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지금 그들은 물론 나 역시 자신만의 시간을 보내고 있기에….
환승역에서 갈아탄 열차는 마주 보고 앉는 의자 칸이었다. 환승역을 빠져나간 아저씨 외에는 오늘 이동하는 여행자와 사람은 없는지 역을 출발하는 2량 열차 내부엔 나 혼자뿐이었다.
여행 중인가요? 어디까지 가나요? 네 니가타까지 갑니다. 왼쪽 창가에 앉아서 가세요. 멋진 풍경을 만날 겁니다. 환승 기차 역시 바다를 보기 위해 오른쪽 좌석에 자리를 잡고 있었는데, 승무원이 다가와 오른쪽에 앉으라며 조언을 해줬다.
초행길인 여행자에게 관심을 두고 조언을 해주었기에 바로 자리를 옮겼다. 그리곤 양쪽 창문을 번갈아보며 주변을 살피는데, 바로 옆 창문으로 정말 멋진 풍경이 나타났다. 그렇게 높아 보이지는 않지만 흰 눈과 마을 그리고 덜컹거리는 기차 소리와 잘 어울리는 그림 같은 산. 창가 옆에 있으면 좁은 틈새 사이로 눈이 비집고 들어오고 냉기가 가득한 추운 날씨였지만 이 풍경을 그냥 지나칠 수 없어 창문을 열고 소리쳤다.
' 오겡끼데스까 ' 영화 속 주인공 대사가 생각나 따라 해봤다. 하지만 돌아오는 건 아무도 없는 기차에서 머쓱한 듯 승무원을 살피며 웃고 있는 나 자신뿐이다. 키득 키득 이렇게 웃고 있는.
마치 상한 생선을 장화에 넣고 다니는 느낌(?)
2량 열차에 혼자 있는 만큼 마음껏 지금 순간을 즐기기로 했다. 우선 아침부터 싣고 있던 장화부터 벗어 버렸다.
오사카에서 삿포로로 가기 전 친한 형님이 선물해 준 하얀 장화였는데, 처음에는 장화를 싣고 다니는 내 모습에 이상한 사람이라며 웃을 줄 알았는데, 눈이 많이 오는 삿포로는 물론 아키타까지 많은 이들이 일상생활에서도 장화를 싣고 다녀 주의 이목도 신경 쓰지 않고 눈길을 거침없이 다니며 편안하게 사용했다.
하지만 장점 뒤에는 단점이 있다. 장화 특성상 피가 잘 통하지 않아 오래 걸으면 다리가 저려왔고 무엇보다 장화를 벗고 난 후 양말에서 풍기는 냄새가 끝내줬다. 뭐라고 해야 할까? 마치 상한 생선을 장화에 넣고 다니는 느낌? 하여튼 순식간에 나의 발 냄새는 기차 내부를 장악했고 그 냄새에 코를 막고 있으면서도 이모님이 챙겨주신 곰돌이 양말을 싣고 있는 내 모습이 웃겨 한 참을 웃었다.
혹시나 다음 역에서 사람이 타면 어떡하지? 몰라 몰라 그냥 모른척하자. 알아서 생각하겠지. 어느새 냄새에 익숙해 졌는지 냄새가 나지 않는 것처럼 느껴져 더 당당해졌다. 물론 혹시나 하는 마음에 창문은 활짝 열어 놓았다.
아름다운 창 밖 풍경에 반하고 기차에서 만난 여행자의 이야기에 취한 즐거운 오늘. 나는 느린 아주 느린 열차를 타고 천천히 많은 것을 보고, 듣고, 생각하고 고민하며 오늘의 목적지 니가타로 향하고 있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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