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가로이 눈의 도시 삿포로를 거닐다. 요건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
아침인가? 설마 내가 해가 질 때 까지 잔것은 아니겠지. 삿포로에 도착한 이후 부터 줄곧 아침마다 든 생각이다. 하루에도 수십 번 날씨가 변하는데 특히 해가 뜨는 시간부터 오전 9~10시 사이에 눈이 많이 내려 커튼을 열어놓아도 따듯한 아침 햇살을 만나기 어렵기 때문이다.
기분 좋은 아침이다. 오늘은 무슨 일이 있을까? 웃으려 그리고 즐거운 하루를 시작하려 부단히 노력했다. 생각하고 싶지도 않은 어제의 기억이 나의 정신을 지배하는 순간 앞으로의 시간은 더 힘들 것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눈의 도시 삿포로를 거닐다.
고등학교 시절 수학여행을 앞둔 어느 날 같은 반 친구의 제안으로 수학여행지에서 당시 중고등학생이라면 다 아는 국내 아이돌 그룹의 댄스를 선보이기로 하고 2주 정도를 틈틈이 시간을 내 준비를 했다. 최선의 준비를 했기에 걱정보다는 우리의 춤을 본 아이들의 폭발적인 환호성이 궁금했고 당연 1등은 우리 차지가 될 거라 생각했다.
결과는 참담했다. 아니 정확하게 이야기하자면 아쉬움이 큰 무대였다. 많은 시간을 노력하고 준비했음에도 무대 위에서 세 친구의 댄스는 마치 율동을 추는 듯했고 심지어 박자와 순서까지 놓쳐 나 스스로 형편없는 댄스였다. 결론을 내렸다.
그 후유증은 오래갔다. 마음 같아선 바람에 실어 날려 보내고 싶었지만 아쉬움이라는 인간이 가진 특성은 오랜 시간 그때의 일을 기억나게 하였고 나는 그때마다 나 스스로 과거에 집착한 미련한 놈이라 꾸짖곤했다.
이러한 나의 꾸짖음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자전거 여행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고 공허함에 사무치기 시작했던 어젯밤부터 지금까지 아쉬움과 꾸짖음은 끊임없이 싸우고 있고 그것이 오래가면 결국 나만 힘들다는 것을 알기에 훌훌 떨쳐버리려 늦은 밤 삿포로 시내로 행했다.
삿포로는 참 매력적인 도시다. 도시 전체를 뒤덮은 하얀 눈도 매력적이지만 마치 옛 과거로 돌아온 듯한 도심을 가로지르는 전차와 도심 곳곳을 따듯한 기운으로 밝힌 네온사인 그리고 도심을 빠르지도 않게 그렇다고 느리지도 않게 여유롭게 걸어가는 사람들을 보고 있으면 마치 내가 영화 속 주인공이 된듯한 느낌을 받는다.
일본 5대 도시로 손꼽히는 도시 중 하나이지만 너무나 고요한 삿포로. 어디서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으로 사람들이 외출하지 않는 것인지 아니면 삿포로에 거주하는 인구가 많지 않은지 모르겠지만, 오늘만큼은 화려한 도시보다는 고요한 도시 삿포로가 무척 마음에 든다.
외로움도 아쉬움도 잊게 하는 음식의 매력.
텅 빈 거리를 거닐다 어디론가 바쁘게 향하는 한 무리의 사람들을 따라 음식점과 상점 등이 모여 있는 쇼탱가(쇼핑거리)에 도착했다.
썰렁했던 도로와는 달리 복잡한듯하면서도 정리가 잘 되어 있는 일본 특색 음식점이 여럿 눈에 띈다. 해산물이 유명한 북해도답게 해산물 요리와 맛있는 삿포로 맥주와 잘 어울리는 각종 안주. 좀 전까지 텅 빈 거리에서 나 홀로 고독을 씹은 내가 맞는지 어느새 메뉴판 앞에서 시원한 맥주를 떠올리며 바보 미소를 짓고 있을 뿐이다.
어떤 음식을 먹어볼까 고민하다 발견한 많은 이들이 줄 서 있는 한국 가게. 평소 SNS나 지인과는 나의 조국 대한민국에 대해 불만만 한가득 내뱉던 내가 어느새 애국자로 변신해 입장을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한국 음식의 맛과 나 역시 한국인임을 자랑하고 이야기하고 싶었다. 남의 일에 꼭 한마디라도 참견을 하는 오지랖 넓은 수다쟁이처럼 말이다.
이곳 삿포로로 오기 전 들린 오사카에서 언제나 나의 여행을 관심 있게 봐주고 응원해주시는 이모부 가미야마상이 내가 방문할 지역에서 꼭 먹어봐야 할 음식 리스트를 뽑아 주었다.
삿포로에서 추천해준 메뉴는 총 3가지. 늦은 시간이라 징기스칸(양고기)은 포기했지만, 나머지 2개인 삿포로 라면과 이쿠라동을 모두 맛보기로 하고 먼저 라면집에 들어가 일부러 작은 사이즈를 주문했는데, 그 양이 오사카에서 먹던 큰 사이즈와 비슷해 결국 라면으로 배를 채우고 발길을 돌리게 되었다. 이쿠라동을 맛보지 못한 게 걸리긴 하지만 라면 맛이 기대 이상이었기에 후회는 없었던 선택. 소화도 시킬 켬 시원한 바람도 맞을 겸 골목길을 따라 삿포로 역으로 걸었다.
요건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
한참을 걷고 있는데 도로 가 옆 녹색 박스가 내 시야에 들어왔다. 사실 삿포로 도착 후 몇 번 거리에서 녹색박스를 보곤 별 관심 없이 지나쳤는데, 박스 위에 여성의 것으로 보이는 실크 장갑이 올려져 있어 주인도 찾아 줄 겸 녹색박스 곁으로 다가갔다.
장갑은 잠시. 나의 호기심은 장갑에서 벗어나 녹색박스 안의 내용물로 향했고, 하얀 15개 남짓한 하얀 봉투에 들어 있는 내용물이 궁금해 나만의 상상력을 동원했다. 눈이 많이 오니까 염화칼슘이 있지 않을까? 설마 그렇다면 도로와 인도 상태가 좋아야 하는 게 아니야? 그럼 뭐지.
나의 상상력이 단편 소설을 쓰기 시작할 때쯤 눈으로 덮여 있던 녹색박스 내용물에 대한 설명을 발견하였다.
안에 들어 있는 내용물은 다름 아닌 미끄럼방지용 모래. 눈이 내리면 염화칼슘을 도로며 인도며 심지어 집 앞에까지 뿌려대는 우리나라와는 달리 비용이 낮고 사후 처리가 손쉬운 미끄럼방지 모래를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인도에 비치해 놓은 것이었다.
사실 삿포로에 처음 도착했을 때 공항 앞 인도에 지저분하게 뿌려진 모래를 보고 혀를 찼었는데 모래가 뿌려지지 않은 눈길에서 몇 차례 넘어진 후 모래가 뿌려진 도로를 보면 반갑기까지 했었다. 시민을 배려해 도심 곳곳에 녹색박스를 설치한 삿포로. 사용하는 사람이 많은지는 모르겠지만 시민을 생각하는 정부 부처의 노력에 적지 않은 감동을 하였다.
한가로이 시내를 거닐고 맛있는 음식도 먹고 녹색박스의 비밀도 알게 되면서 어젯밤부터 쌓인 아쉬움과 고민이 조금은 풀어져 가벼운 발걸음으로 숙소로 돌아왔다. 방으로 들어오는 길에 카운터에서 받은 정체불명의 종이봉투. 오사카 이모님을 통해 이모부이신 가미야마상이 삿포로에 사는 친구를 통해 전달한 물건임을 알게 되었고, 방에서 내용물을 확인하였다.
봉투 안에 있던 것은 다름 아닌 추운 겨울 필수 아이템인 마스크와 일본 돈 5만엔. 어제의 일로 자전거 여정을 기차와 버스 그리고 배로 이동하는 것을 추천한 이모부님이 삿포로로 오기 전 뽑아주신 지역별 음식을 꼭 먹어 보라며 여행 비용이 많지 않은 나를 위해 친구를 통해 적지 않은 금액을 전달해주신 것이었다.
생각지도 못한 선물에 당황하고 감사함(이모부님 깜짝 선물 감사드립니다. 지난 과거 때문에 부끄러운 모습 보여 드린 것 같아 죄송합니다. 알려주신 여행정보를 참고해 멋진 추억 만들며 이모부님이 계신 오사카로 돌아가겠습니다.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도 가득했지만, 무엇보다 지난 과거에 후회하고 속상해하며 한탄했던 나의 모습이 생각나 고개가 숙여졌다. 즐겨도 부족한 시간인 여행을 작은 호텔 방에 처박혀 후회만 하는 내 모습이 너무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전화해 감사함을 전하고 노트북을 열었다. 그리고 자전거로 가려 했던 그 길을 대중교통을 이용해 갈 수 있도록 꼼꼼히 체크했다. 어느새 시각은 새벽 2시를 훌쩍 넘고 있지만, 여전히 내일부터 시작될 여정을 계획하고 있다. 그리고 쉬지 않고 나 자신에게 이야기하고 있다. 나의 여행은 ING라고~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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